구성군 이준

조선 2017. 6. 1. 09:38

재미있는 인물을 발견했다.

구성군 이준은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2남으로 왕실의 종친이다.

임영대군은 세조가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뒤에 세조를 지지하면서 안평대군과는 달리 잘 먹고 잘 살았다.

세조 치세의 말년에 벌어진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이를 계기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는데 27세에 병조판서에 28세에는 영의정에 오른다. 세조의 신망에 주변에서의 평가도 좋았던 이른바 능력있는 왕족이였다.

재미있는 것은 세조의 사후에 벌어진 일이다.

세조 이후 왕위에 오른 예종은 고작 2년만에 발에 난 종기로 인해 사망한다. 이에 예종의 조카인 질산군이 12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니 바로 성종이다. 요렇게 되고나자 왕실종친인 구성군의 위치가 재미있어 진다.

나이 어린왕에 신망받는 왕실종친이라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나?

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종은 고작 2년만에 사망하고 아들이 12살에 왕위에 오르니 단종이다. 그리고 그 단종에게는 문무가 뛰어난 숙부가 있었으니 이른바 수양대군.

구조가 완전히 비슷하지 않은가? 재미있는 점은 더 있다.

세종은 문종이 몸이 약한것을 걱정했다. 문종이 죽으면 단종이 혼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신들에게 단종을 부탁했으니 이때 대신들이 황보인, 김종서, 신숙주, 박팽년 등이다. 이후 수양대군은 대신들이 왕을 농락하고 국가를 문란하게 한다며 난을 일으키니 계유정난이다. 이때 김종서와 황보인을 척살하고 실권을 잡은뒤에 왕위를 선위받아 왕에 오르니 세조다.

세조의 말년에 건강이 급격히 안좋아지자 신숙주, 한명회 등의 대신들을 원상으로 임명하여 나이 어린 왕을 보필하도록 하였고 섭정으로 구성군 이준을 삼았다. 그런데 다음 왕위를 이은 예종이 2년만에 승하하고 조카가 왕위에 올랐는데 나이가 고작 12살이다.

어린 나이의 왕, 능력있는 종친, 후사를 부탁받은 원상대신.

단종, 수양대군, 김종서

성종, 구성군, 한명회

사람만 달랐지 돌아가는 모양은 똑같다.

물론 단종과 성종은 상황이 달랐다. 어머니에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도 없었던 단종과는 달리 성종은 어머니와 할머니가 모두 살아있었고 할머니인 정희왕후가 섭정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대신들은 필연적으로 구성군이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면 자신들의 과거가 지금의 상황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설사 구성군에게 야망이 없더라도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 붙는다면 계유정난2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였다.

덕택에 구성군은 대신들의 탄압으로 유배를 간뒤 유배지에서 죽었다.

어린나이에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랐던 구성군은 제발저린 계유정난 공신들때문에 계유정난2의 예방으로 정치적 살해를 당했다. 뭐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불쌍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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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제국(광활한 영토를 지닌 제국이 였다)

 

 히브리 종교의 마지막 발전 단계 기원전 539년부터 300년경까지로 이를 ‘포수 이후’라고 불린다. 이 시기 히브리 종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그들을 정복하고 이주시킨 페르시아였다. 당시 메소포타미아지역의 최강자였던 페르시아는 그들이 통치했던 영역에 미치는 권력만큼이나 문화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당시 그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던 그들의 독특한 종교 역시 수많은 민족에게 영향을 끼쳤는데 히브리 민족도 이 영향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자라투스트라(그리스명 : 조로아스터)

 

▲조로아스터교의 표식

 

 당시 페르시아의 종교는 조로아스터교로 독특하면서도 매우 호소력이 강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어느 종교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원론적인 종교라는 점이였다. 그들의 세계는 두 가지로 구분되었으며 각기 선과 악으로 대표되는 영적 존재에가 다스리고 있는 세계였다. 그리고 이 둘은 이 세상의 주도권을 가지기 위해 끊임없지 투쟁한다. 그리고 마침내 최후의 날 빛이 승리하고 모든 영혼들이 다시 부활해 빛의 신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교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 종교는 선을 권하고 매우 중시했는데 이는 최후의 심판의 날 그들이 받게 될 복을 위함이었다. 이러한 종교의 특성은 대중들에게 상당히 쉽게 전파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강력한 호소력을 띄었는데 특히 뚜렷한 사후세계와 죽은 뒤에 또는 최후의 날에 받게 되는 보상 등은 민중에게 큰 호응을 받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히브리 민족도 이러한 영향력 아래에 자유롭지 않았다.

 





▲ 메시아, 최후의 심판, 사탄은 이 시기 형성된 교리이다.

 

 수많은 민족이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았듯이 히브리 민족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그 종교에 녹아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강력한 매력의 교리를 자신들의 종교에 흡수하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적, 메시아적, 내세적 종교관은 흡수되고 변형되어 야훼를 절대적 선의 신으로 만들었고, 악의 근원으로 사탄의 존재를 만들어 냈다. 내세설과 메시아설의 경우 더욱 다듬어 발전된 종말론을 만들어 냈는데. 영적 구세주, 죽은 자의 부활, 최후의 심판의 개념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에 따라서 사후 세계의 개념도 바뀌게 되었는데 이제 사후 세계는 그저 단순한 음습한 장소가 아닌 살아생전의 일에 대한 보상이자 죗값을 치르는 곳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곳은 현재 세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공명정대한 곳이자 가장 살고 싶지 않은 다시 말해서 문자 그대로의 지옥 같은 곳으로 변하게 된다. 이러한 페르시아의 영향은 궁극적으로 히브리인의 종교를 완성시킨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완성된 종교를 최종적으로 정리해 문서로 남기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성경]이다. [성경]은 신의 직접적인 영감에 의해서 기록된 신성한 계시로 받아들여지게 되며 그러하기에 성경은 절대로 거스를 수 없는 가장 강력하며 신성한 것으로 간주된다.

 일찍이 기원전 1900년부터 자그마치 1600년의 세월 끝에 히브리 민족의 종교는 완성되게 된다. 후대에 [유대교]라고 불리게 된 이 종교는 현대의 인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종교적인 부분에서는 감히 비교할 대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가장 작으며 힘없는 민족이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모든 존재들에게 박해 받던 민족이 이제는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위치에 서게 된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옛 땅을 다시 되찾고 돌아갈 수 있었던 것. 이 모든 것이 어쩌면 그들을 계속 지탱하고 하나로 뭉치게 해준 이 종교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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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가들의 시대

모세의 시대가 히브리 민족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면 이 시기는 종교적으로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922년 솔로몬왕의 사후에 국가는 둘로 분열되었고 밖으로는 강대한 국가들이 자신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부가 편중되고 윤리와 도덕은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때가 히브리 종교의 세 번째 단계인 예언자들의 시대이다.

이 시대는 히브리 민족에게 불행했던 시간이었다. 나라는 둘로 분열되었고 외부에서는 막강한 힘을 가진 아시리아의 위협이 계속되었다. 내부적으로도 문제는 심각했다. 부는 한쪽으로 편중되어 있었고 가진 자들은 없는 자들을 핍박하는 것에만 힘쓰고 있었다. 당시의 이러한 상황이 성경에 자세히 나오고 있는데 당시의 부패가 얼마나 심했는지 고작 재판관들은 신발 한 짝 값의 뇌물에 사람을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아모스서 2 : 6, 8 : 4~6)

히브리 왕국의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웠던 이 시기는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가장 크나큰 발전이자 중요한 변화의 시기였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함을 느낄 수 있다.

 

 

                         

 

                                  

▲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이들의 주도로 히브리 종교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다

 

이 시기의 종교적 변화는 유명한 예언자들(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에 의해서 실행되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이러한 고난을 받는 것을 예언자들은 신의 분노로 표현하며 사회를 비판했다. 사회가 너무도 타락해서 신이 이러한 벌을 내리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서 히브리 종교의 신은 그전과는 다른 모습, 즉 유대교의 신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예언자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오로지 신만이 이를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또한 이를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소가 추가되어야만 하였다. 모든 원인은 신에 의한 분노로 발생된 것이었다. 여기서 신은 자신의 분노를 충분히 표현할 만큼 막강한 힘을 지닌 존재로 설명되었으며 이로써 야훼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신의 성질을 갖게 되었다.(유일신) 또한 신은 당시의 타락한 사회상을 분노하는 존재로서 악을 멀리하고 선을 추구하며 약자를 보호하고 악을 행하는 부당한 존재를 멀리하는 윤리성을 갖게 되어 당시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되었다.

이러한 종교적 변화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기존의 종교적 교리를 벗어난 아예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이러한 종교적 변화는 내부적인 자성의 목소리가 아닌 외부적 환경에 의한 변화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종교 자체에 막대한 변화를 주는 일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 일을 추진한 예언가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행동을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이러한 변혁이 당시의 종교를 좀 더 순수한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일례로 당시 이민족의 종교에 보였던 많은 거친 제사 풍습들이 상당히 일소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교리의 변화는 당시의 대중에게도 무리 없이 들여졌는데 이는 이를 주도한 예언가들의 의도가 정확히 먹혀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패배감과 박탈감을 느끼고 있던 대중들은 변화된 신을 통해서 위안을 받고 의지할 수 있게 되었다. 강력하며 정의롭고 유일한 그들의 신은 강력한 적 아시리아로부터 자신들을 충분히 보호할 뿐만 아니라 당시에 부패한 권력층을 심판해 주리라는 믿음을 심어주었고 이를 통해서 민족은 종교라는 구심점 아래에서 견딜 수 있었다.

이러한 많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직 종교는 유대교의 모습에 완전히 부합하지 않는다. 현재의 유대교가 가지고 있는 대적자(사탄)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내세관도 변화하지 않았다. 내세관은 여전히 그 지역의 내세관을 차용하고 있었으며 종교는 여전히 현실을 중시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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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을 이끄는 모세

(초기 히브리 민족의 종교와 정치 분야에 핵심적인 인물이다)

 

 기원전 13세기부터 9세기까지 히브리 종교는 두 번째 발전단계에 집입하게 되며 이 시기를 민족적 단일신 숭배의 단계라고 이야기 한다. 단일신 숭배란, 다른 신의 존재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오직 하나의 신만을 숭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기 히브리 민족의 역사는 모세를 통한 이집트의 탈출에서부터 여호수아를 비롯한 사사들의 통치와 사울로 시작되는 통일 히브리 왕국까지이다. 이 시기의 종교적 발전은 모세의 출현과 함께 시작되었다.

신은 이제 애니미즘적 요소에서 완전히 탈피되었으며 완벽히 의인화 되었다. 기존에 각 부족들이 믿던 수호신들은 이제 민족을 수호하는 하나의 신으로 점차 통합되었고, 그와 함게 기존의 신들과는 다른 고유한 속성을 가졌으니 그것을 나타내는것이 바로 이름이다.

 

 

▲ 시나이산

(모세가 이곳에서 야훼를 만나 십계명을 받았다고 한다)

 

 신의 이름은 YHWH. 즉, 야훼이다. 원래 야훼라는 신의 이름은 시나이 반도의 히브리 민족이 믿던 신을 뜻한다. 출애굽 과정에서 모세가 이를 받아들여 민족의 대표신의 이름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서 새로운 신의 존재성은 과거의 신들보다 발전되었다.

 이 시기 히브리 종교의 특징으로는 그들이 믿는 신이 고유성을 획득하고 단 하나의 신으로 정리되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신은 각기 다른 부족의 뜻을 대변하지 않았으며 그들만의 의미나 속성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대신에 종교는 민족의 공통적인 뜻을 추구하기 시작하고 이는 곧 민족적 이익이나 선행을 중시하는 개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 하나의 신으로 통합된 것처럼 각기 부족이 가지고 있던 의식이 통일되고 이를 체계적으로 기록, 정리함으로써 유럽이 탄생했고 이것이 나아가 종교의 경전으로 발전되었다. 이때 집필된 성서는 창세기를 포함한 [모세5경], 솔로몬과 다윗이 기록했다는 [시편], [잠언] 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때의 종교는 후대 유대교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대표적으로 아직 신에 대한 관념은 유일신 숭배가 아닌 단일신 숭배였다. 이는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신은 아직 다른 민족의 신들을 부정하지 않고 단지 금하고 있을 뿐이다. 신이 그들을 금하는 이유는 그들이 거짓신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러한 행위를 질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신은 전능하지 못 했다. 그의 권능은 그들의 영토에 국한되었으며 그들의 영토 밖의 다른 민족에게 어더한 영향도 주지 못 했다. 그의 권능은 그들의 영토에 국한되었으며 그들의 영토 밖의 다른 민족에게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 했다. 실제로 성경에 보면 신은 그들의 영토를 침범한 적은 물리쳐 주었지만 그 적을 아예 몰락시켜 위협을 없애주지는 않는다.

 또한 이 시기의 히브리 종교는 영적이라기보다는 현실적이었다. 이제 신은 부족뿐만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부와 영광을 보장했다. 다만 약간의 윤리적인 측면이 강조되었을 뿐 영혼은 여전히 스올(Sheol)로 내려가 사라지는 등 내세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는 후대 유대교뿐만이 아니라 서양의 사상적인 부분에도 영향을 끼친 중요한 발전요소가 나타났는데 과거의 애니미즘적 요소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신이 자연에서 완전히 벗어난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신은 자연의 법칙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행동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와 함께 신을 대신해서 인간이 자연을 맡게되었고 인간은 이러한 자연을 지배 할 수 있다는 당위성을 만들어 주었다. 이것이 후대의 서양인의 사고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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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땅(구약시대 히브리민족의 주무대이다.)

 

 초기 히브리 종교를 설명하는데 창세기를 참고로 이야기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특히 야곱의 이야기는 초기 히브리 종교의 모습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어 예시로 적합하겠다. 앞에서 이야기 했다시피 현재의 유대교는 결코 한순간에 완성된 종교가 아니었다. 특히 이시기는 아직 유대교만의 특징이 있기 전의 상태였고 오히려 후대의 유대교에서 보기에 우상숭배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SPAN style="FONT-SIZE: 10pt; FONT-FAMILY: '3028108_10'"> 첫 히브리 민족의 종교는 당시 주변 문명과 같은 애니미즘적 요소가 강했다. 나무, 산, 신성한 우물과 샘, 특이한 모양을 한 돌 등을 믿고 섬겼다. 이러한 모습은 창세기에 잘 나와 있으며 후대에 하나님에 의해 선택 받아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가 되는 아브라함의 시대에도 간혹 모습을 보이고 있다. 초기의 히브리 종교도 다른 고대종교와 시작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SPAN>

 


      

 

▲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애니미즘적 요소들

(나무, 바위, 우물, 무지개 등을 신성시 했던 모습을 볼수 있다.)

 

 

 이러했던 종교가 다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부족체제가 자리를 잡은 뒤로써 성경에서는 대표적인 인물로 아브라함을 소개하고 있다. 이 부족의 시대에 히브리 종교는 애니미즘적 요소를 탈피하고 의인화된 신을 믿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당시 부족사회를 이루면서 가부장의 위치가 부각되게 되었고 이러한점이 종교관에도 영향을 미쳐 부족의 지도자이자 가족의 아버지 같은 이미지의 신으로 의인화되게 된다.(현대의 기독교가 신을 아버지라고 표현하는 것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당시의 신은 각 부족의 족장들이 있듯 각 부족마다 존재했으며 그들의 위치는 각 부족을 수호하고 그들을 풍요롭게 해주며 자신들을 이끌어 나가는 존재였다. 이때의 신들은 아직 이름이 존재하지 않아 통상 엘EL 또는 엘로힘으로 불리워졌다. (엘은 신이라는 히브리 고유명사, 창세기 32 : 29) 어떻게 본다면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이때가지만 해도 아브라함의 가계의 수호신에 지나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모세가 출현하기전인 기원전 1250년경까지 지속된다.

 

 

▲라반의 드라빔을 깔고 앉은 라헬

(다른신에 대해 어떠한 배척도 없었던 것을 알수 있다)

 

 이 시기의 특징으로는 아직 민족을 대표할 만한 신이 등장하지 않았다. 또한 신은 스스로에 대한 명확한 존재적 정의가 없었다. 아직 신은 각 부족의 뜻에 따라 달라지는 인견을 갖춘 수호신이었다. 이러했던 상황이기에 타민족의 신에 대해서도 특별한 반감이나 배타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신에 대한 믿음도 갖는 다신교적 요소가 있었다고 보는 편이 더 옳을것이다(창세기 31 : 19 ~ 35 - 라헬이 라반의 드라빔을 도둑질하다). 율법이나 의식은 아주 단순한 형태만을 갖추었다.(창세기 17장  - 할례의식, 28 : 22 - 십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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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으로 히브리 민족은 굉장히 나약한 민족이었다. 현대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외침을 받았고 결국에는 나라를 잃고 떠도는(디아스포라)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들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 했고 사람들의 멸시를 받았다. 이집트, 바빌론, 로마, 히틀러 등 당시 역사의 강자들은 필수적이다 싶을 정도로 그들을 박해했다. 히브리 민족의 역사는 울분과 한의 역사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치사적으로 매우 고난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히브리 민족이지만 문화, 특히 종교적인 부분을 살펴보면 이야기는 180˚ 달라진다.

 인류의 3대 종교 중 2개의 종교는 히브리민족의 종교에 영향을 받았다. 그들의 기본적인 토대는 모두 히브리인의 유대교에서 나왔고 어찌 본다면 기독교나 이슬람교는 유대교라는 심원지에서 갈라져나온 거대한 강줄기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각각 서양과 중동에 막대한 사상적 영향을 끼친 만큼 유대교는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나약하고 보잘것없던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를 창시했다니 참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역사상 가장 큰 발전을 한 민족 종교는 미신에서부터 유일신교까지 모든 종교적 발전 과정을 거쳤다. 그들이 거주한 가나안 땅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당시 가장 발달한 2개의 문명, 즉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으로 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히브리 민족 종교는 4가지 단계를 거쳐서 발전하였으며 이러한 발전은 바빌론 포수를 끝으로 완성되게 된다. 세계에서 가장 고등한 종교의 탄생은 결코 한순간에 이루어 지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어떠한 사상이나 종교는 결코 한순간에 뿅하고 나타나지 않는다. 모든 것에는 그에 합당한 이유와 환경, 그리고 시간이 소요되게 된다. 유대교도 마찬가지 이다. 이 종교도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사건과 환경, 사람들을 거쳐 발전하게 되었다. 앞으로 올릴 글은 히브리민족의 종교의 각 단계별 발전과 그 특징을 이야기 하도록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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